《고릴라》의 작가 앤서니 브라운
《동물원》을 중심으로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논장
나를 그림책 세계로 이끈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앤서니 브라운일 것이다.
지금은 대학생인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일이다. 나보다 먼저 그림책에 눈뜬 아내가 앤서니 브라운 원화 전시회에 가자고 해서 마지 못해 길을 나섰다.
그때의 내 모습이 앤서니 브라운의 《동물원》에 나오는 아빠의 모습과 닮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부천에서 전철을 몇 번 갈아 타고 물어 물어 서울의 모 미술관 지하 전시장에 도착했다.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그까짓 원화 전시가 뭐라고 귀한 휴일을 망쳐놓는가 하고 내심 불만이 많았는데,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들을 보는 순간 경이로운 환상의 세계로 초대 받은 듯한 감동의 물결이 전해와 그동안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엇보다도 고릴라의 생생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어떻게 저렇게 세밀하게 표현해냈을까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것은 세계의 유수한 명작들을 보는 것 이상이었다. 그때 그림책이 미술관의 역할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을 나설 때 앤서니 브라운이 내게 전해 준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고릴라의 모습이 생생하게 박힌 대형 포스터를 몇 장 사가지고 와서 내 방 곳곳에 붙여놓았다. 그러고는 10여년의 세월 동안 빛에 바래 누렇게 뜰 때까지 바라보았다.
《동물원》은 한 가족이 일요일에 동물원 구경을 가서 겪는 이야기다.
그림책의 표지는 그림책의 내용을 암시하는데, 《 동물원》의 앞표지에는 언뜻 얼룩말을 연상 시키는 검은색과 흰색의 줄무늬 속에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거대한 몸집의 아빠 옆에는 주눅든 듯 한 왜소한 엄마가 있고, 앞줄에는 어린 꼬마 형제가 기대에 찬 똘망한 눈빛을 빛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를 온전한 기쁨으로 발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가족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아빠의 힘이 이 가정에 어떻게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차가 막혀 동물원까지 가는 데 한참 걸린다. 차 안에서는 아이들이 티격 태격한다. 아빠는 형을 나무란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우리가 만난 지옥이 무슨 지옥인 줄 아니?" 하고 묻는다. 모르다고 대답하자 아빠가 큰 소리로 외친다. " 바로 교통 지옥이지." 다들 ' 와하하 ' 웃었다. 나랑 엄마랑 해리만 빼고.
이렇듯 아빠는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식 썰렁 개그를 하면서 혼자 웃는 인물이다.
매표소에서는 다섯 살이 넘은 해리를 네 살이니까 입장료를 반으로 깎아 줘야한다고 우긴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초콜릿을 먹어도 되느냐고 물으니까 지금은 안 된다고 말하는 아빠의 머리 위로는 흰구름이 떠있는데 뿔 모양이다. 이로써 아빠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에는 이와 같은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어린시절 '모양 상상 놀이'가 작품으로 수용된 것이다.
'모양 상상 놀이'란 첫 번째 사람이 추상적인 형태 하나를 그리면 두 번째 사람이 색깔이 다른 펜을 이용하여, 그 행태를 다른 것으로 변형하며 노는 놀이이다.
앤서니 브라운이 ' 모양 상상 놀이' 를 하고 놀았다면 우리 가족은 '언어 상상 놀이' 를 하며 놀았다. 큰 아이가 다섯살, 둘째가 네 살 때 여행길에서 아내가 제안한 놀이이다.
첫 번째 사람이 " 어느 마을에 한 아이가 있었어요."하고 운을 떼면 다음 사람이 그 뒷부분을 이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뒷날 앤서니 브라운이 밝힌 어린 시절 즐겨 놀았다는 '모양 상상 놀이' 와 방식이 닮아있어 깜짝 놀랐다.
이런 자유로운 상상 놀이를 통해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표현하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젊은 엄마들에게 이런 놀이를 제안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한가한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나 하나 더 외우라고 하지 않을까?
호랑이 우리에서는 담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걷는 호랑이를 보고 엄마가 불쌍하다고 하니까 "저 녀석이 쫓아오면 그런 소리 못 할걸. 저 무시무시한 송곳니 좀 보라고 ! " 하고, 펭귄을 구경할 때는 "동물원에 있는 동물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은 ?"하고 묻자
아이가 투덜거리듯 "몰라요'.'라고 대답하자 웃음을 터뜨리며
"붕어빵이지!"
아빠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배를 움켜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어 댄다.
고릴라 우리 앞에서는 아빠가 킹콩 흉내를 내며 가슴을 쿵쿵 쳐댄다.
이 가족이 동물원을 함께 구경하면서 가족다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배고프다고 징징대고 싸운다.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는 아빠와 제 멋대로인 아이들 사이에서 엄마는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앤서니 브라운은 다음에 소개할 《돼지책》에서 잘 보여준다.